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문단 편집) === 영향 === 사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기 이전에도 인쇄 기술은 존재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14세기 경부터 목판인쇄 기술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당시 목판인쇄는 목판에 잉크를 묻히고 종이를 위에 올린 후 롤러로 미는 방식으로 인쇄했는데 이 과정에서 잉크가 번지거나 종이가 찢어지기 일쑤였기 때문에 인쇄 품질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시절 유럽에서 책(Book)은 '''공예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목판인쇄를 통해 만들어진 싸구려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선 책이란 그냥 글자 정보를 전달하는게 본질이기에 그냥 기록매체에 글자만 주르륵 써 있고 표지는 종이나 가죽이고 실로 꿰맨 것으로 마무리됐으나, 유럽에선 책이라하면 양장본 하드커버에 그림에 금속장식까지 들어간 정말 공예품 개념이었다. 동아시아처럼 '''별다른 공예적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글자만 담긴 것은 [[팸플릿]]으로 아예 따로 구분이 되었다.'''[* 동아시아에는 아예 없는 개념인 팸플릿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유럽의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필사의 시대에는 책의 가격이 책의 문자수와 정비례했다. [[성경]] 1질 값이 시골의 농노의 집보다도 비쌌고, 도시의 잘 지어진 연립 주택 1채보다 약간 낮은 가격이었다. 15세기 유럽 최고의 장서가로 알려진 [[제프리 초서]]가 보유하고 있던 책 수가 90여권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이 정도 책을 보유하려면 엄청난 돈과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순수한 글자로 정보 전달용도인 팸플릿 역시 수요가 따로 있었다. 바로 대학. 중세 유럽에서 대학이 처음 설립된 무렵에는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뒤 음독하면서 내용을 외운 다음 강의를 들어서 이해하는 식이었는데, 불과 백년도 지나지 않아서 [[족보|교재의 핵심내용을 요약한 작은 책자를]] 강의에 가져가서 듣는 걸로 바뀐다. 그런데 팸플릿의 수요가 제일 많았던 대학에서는 필경사들을 대규모로 고용해서 자급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굳이 품질 낮은 목판 인쇄물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 당시 목판 인쇄는 성화나 공문서를 복사하는 등의 제한된 용도로만 활용되었다. 그래서 구텐베르크는 이러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동시에 책이 싸구려로 보이지 않게 하는데도 많은 공을 들였다. 생산성이 크게 향상됐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생산량을 제한했고 삽화가를 동원해서 그림을 그려넣었다. 인문주의자와 대학이 초기에 인쇄기를 멸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기는 책의 소비자 가격을 20%로 확 줄여버렸기 때문에 인쇄기의 가능성에 온 유럽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1470년대에는 이미 유럽 주요 대도시 12곳에 인쇄소가 열렸고, 1500년이 되면 온 유럽에는 240곳으로 확 늘어났다. 이 시대의 책은 국제 교역에도 쓰일 수 있는 고급 상품이었기 때문에 70%가 넘는 책이 라틴어로 계속 쓰였고, 국제 교역망을 따라 퍼진 염가의 책은 기존의 5배나 비싼 필사본 책들을 결국 밀어내버렸다. 발명 전 [[유럽]]에서 500~1400년대까지 필사된 책의 총량은 대략 10만 여권으로 추산된다.[* 현재 중소규모 지방 [[공공도서관]]의 평균 장서 수가 10만 여권 정도 된다.] 인쇄술 발명 후 불과 5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1,500~2,000만 권이나 되는 책이 생산되었다. 이는 이전 인류가 생산한 책의 숫자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로 인해 지식의 전파가 급속도로 빨라졌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철학이나 [[과학]]을 연구하고 발표 및 정리해서 출간하여 학자간에 새로운 발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등 학문상의 '촉매 작용'이 활발해졌다. 물론 학문 측면뿐만 아니라 [[플레잉 카드]]같이 비 학문 분야 역시 인쇄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또한 필사 시대에는 오·탈자 및 왜곡의 여지도 많았는데, 이것은 필사 과정에서 어느 사본이 신뢰도가 높은지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했다. [[성경]]을 예로 들자면 [[요한 복음서]]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 파트는 초기 사본에는 나타나지도 않다가 후대에 각주로 첨가된 것인데, 필사 과정에서 스리슬쩍 성경 본문으로 뒤섞이는 오류가 나타났다. 심지어 어느 필사자가 '이 문단은 내가 본 다른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며 지웠다가, 또 다른 필사자가 '옛 글을 마음대로 왜곡하지 마시오'라며 옆에 낙서를 해놓고 다시 더한 사본도 있다. 책을 생산하는 방법이 오직 필사뿐이니, 이미 유통되어서 필사되고 있는 책의 내용을 수정하는 것은 원저자도 불가능했고 어느 것이 진짜 원본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인쇄로 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자 '표준적인 원본'이 생겨났고 심지어 그것을 수정한 새 판본을 찍어내서 유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렇게 서지학(書誌學)이 탄생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전까지 필사로 유통되었던 책들에 대해서도 '표준적인 원문'을 정리하는 작업도 행해졌다. 심지어 [[성경]]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욱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성경과 같은 값비싼 책보다는 값이 싼 출판물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물 중에 제일 잘 알려진 것은 성경이지만 사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가치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주로 똑같은 서식과 문장이 반복해서 계속 쓰이는 행정 서류였다. 이 중에는 다름 아닌 [[면죄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쇄술로 인한 파급 중 제일 유명한 것은 [[개신교]]의 출현과 [[종교개혁]]일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1519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교황파인 요한 에크와 공개 토론을 벌이는 등 본격적으로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루터의 연설문, 논문, 논박문은 [[독일어]]로 번역 인쇄되어 광범위하게 퍼지고 전유럽으로 불길이 번지면서 이를 통해 [[개신교]] 탄생의 시작이 된다. 또 신구교간 종교전쟁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당시 분위기상 루터가 아니더라도 [[종교개혁]]은 시작되었겠지만, 짧은 시일 안에 막대한 양의 문서와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술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는 단 2주만에 전 독일의 인민을 사로잡은 종교개혁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저 독일 지역 내 한구석의 수도자들의 논쟁에 지나지 않았을수 있다. 또한 루터가 1522년 34년 발간한 '독일어 성서'는 널리 보급됨으로 인해 근대 [[독일어]]의 초석을 다졌고 민족주의의 형성에 기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독일]]에선 매년 100만 권 가량의 책이 인쇄되었다는데, 이 중 1/3이 루터의 저서였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인쇄술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번역된 공인 [[성경]]과 기도서 [[미사]]경본[* 이때문에 [[트리엔트 미사]]가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다.]을 각 지방교회에 대량으로 배포할 수 있도록 해 가톨릭이 하나로 뭉치고,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효율적으로 [[개신교]]에 반박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대항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개신교 평신도 A가 성경을 근거로 가톨릭을 비판하고, 가톨릭 평신도 B가 성경을 근거로 개신교를 비판하는 식의 일이 가능해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종이를 대량생산후 배포할 수 있는 미디어로 만든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은 일반인들에게 비쌌다. 사실 위에도 써 있지만 이전 성경의 가격은 잘 지어진 도시의 집보다 약간 낮은 가격이었는데 그것이 20%로 줄어든 것이다. 좋은 집의 5분의 1 가격이 결코 싼 것은 아닐 것이다. 1628년 영국 기준 성경 1권은 183파운드 금화로, 일반인 농부는 몇 세대에 걸쳐 돈을 모아야 살만한 가격이었다. 1604년 발간된 [[돈키호테]] 종이 코덱스 1권의 정가는 290.5 마라베디 은화로, [[금화]]로 치면 8.5개에 준하는 값이었다. 현대 가치랑 비교하면 몇백만원은 된다. 돈키호테 내의 묘사에서 돈키호테는 원래 귀족 가문으로서 상당히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사도 소설을 사모으려고 땅을 죄다 팔아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는데, 돈키호테가 가지고 있던 책은 불과 100권 정도였다. 책의 생산 속도는 빨라졌어도 종이 생산이 획기적으로 는 것은 아닌지라, 구텐베르크 이후에도 책의 가격은 종이의 생산량과 가격에 많이 구애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급격히 전파되고 유럽 사회를 흔든 것은 높은 도시화율과 도시민들의 높은 교육률이라는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지, 반대로 구텐베르크 때문에 이전에 교육이나 지식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농촌 대중들까지 지식 사회로 편입되는 격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보다 수백년 뒤인 나폴레옹 시대까지조차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정도의 문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부사관을 하기에 충분한 인력으로 취급되었다. 훨씬 더 후대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자서전에 적혀 있는 일화를 통해서도 산업 혁명 이전의 책의 가격을 가늠할 수 있다. 어린 링컨이 이웃 부유한 농장에 가서 일했는데, 어릴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부지런한 어린 링컨에게 농장주가 책을 빌려줬다. 집에서도 책을 읽으며 잠이 들었더니만 비가 와서 창가에 둔 책이 비에 젖었다. 링컨은 스스로 농장주에게 다음 날, 가서 모든 걸 설명하고 책값으로 한동안 거저 농장일을 하기로 농장주와 합의했다는 것. 책값이 약 360여년전보다 많이 싸졌지만, 여전히 책값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뭐 링컨은 부지런히 다 일해서 책값을 갚았는데 농장주가 기뻐하면서 가지고 있던 책을 선물해줬다는 이야기이다. 국내 위인전에서도 해당 일화를 싣으며 1820년 초반 미국에서도 책은 매우 고급스런 물품이라 보통 사람이 책 한권 사자면 당시 평균 일당으로 며칠이나 보름 이상까지 갈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고 나올 정도였다. 또 비슷한 시기의 일화로, [[종의 기원]]의 경우 1859년에 나온 초판 8000 부가 모두 팔린 것이 엄청난 대박으로 여겨졌다. 이외에도 1800년대~1900년대 초에 나온 베스트셀러 소설들의 경우 대다수는 이동식 도서관을 통해서 유통되었으며, 한국도 불과 수십년 전에도 교과서를 물려주거나, [[대본소]]나 [[책방]] 등 책을 싸구려 종이로 찍어낸 것을 빌려주거나 중고로 사고파는 등 책은 대다수의 서민들에게는 직접 사기에는 꽤 비싼 취미였다. 산업혁명 초기 시대까지도 책의 출판량과 유통량은 2차 산업혁명 이후에 비해서 매우 적은 편이었다. '''책을 기분 내키면 살 수 있는 시대는 수십년도 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